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갔다.
정신차리고 보면 야금야금 속절없이 가버리고 마는 봄날, 봄의 초입에서 나는 스물 몇 살에 봤던 이 영화를 다시 봤다. 그 때는 영화 끝나면 라면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영화관을 나서서 정말 라면을 먹었고, 서른 두 살이 된 지금도 무지하게 라면이 먹고 싶다. 그 때랑 지금이랑 같고도 다른 라면.

때리면 울고 얼르면 웃고, 그 반응이 너무 정직해서 안그래도 재미없는 그 남자의, 가족에게 인사드리러 가자는 말에, 여자 정색을 하며 “상우씨 나 김치 못담궈.”라고까지 말해도 못 알아듣는 그 순진함이 갑갑하고 부담스러웁다. 그리고 그 명백한 거절의 말에도 “내가 김치 잘 담그니까 괜찮아”로 대꾸할 수 밖에 없는 남자. 자존심이야 뭉게지든 어찌되든, 내 하고픈 말 다 해버리면 후회는 없을 것 같으니까 일단 지르고 보는 건데. 그 사람은 나를 눈치없고 순진해서 부담스럽덴다. 그렇게 나는 영화를 보며 은수와 상우를 번갈아 오갔다. 

그리고 연휴 끝자락에 라면을 하나 삶아 먹고 나서, 필요 이상으로 뭔가를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을 한껏 살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배워보는 관계의 치트키 몇 개를 정리해보았다.아 부디 써먹을 일이 있어야 할텐데 크크.


# 치트키 1. 이미지 깨기.

은수. 고봉밥을 앞에 두고 “내가 못먹을거 같아요?”

일본 아줌마나 입을 법한 유니클로 St.를 입어도 예쁘고 갸냘픈 은수. 나 겉으로만 봐선 알 수 없는 고봉밥 먹는 녀자야. 그렇다고 진짜 다 먹으면 그냥 밥 많이 먹는 녀자. 은수는 장난처럼 말하고 상우에게 자기 밥 덜어줬다.


# 치트키 2. 져주기.

은수: 2번이 좋아요. 
상우: (뭔가 마려운 표정으로) 3번이 좋아요. 왜냐면 3번이 더….(그냥 좋다규ㅣㅁㄴ아ㅓㄹㄴ미알헝헝)
은수: 2번이 좋아요 2번으로 해요.

그렇게 녹음실로 들어가, 녹음을 마치고 은수, 상우를 바라보며 손가락 세 개를 만들고 웃는다. 상우 넉다운. 작은 언쟁 이후 져줘서 기분 풀어주기. 관계에서의 승자인 사람은 일부러 질 줄도 안다.


# 치트키 3. 분위기 전환하기.

상우: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결혼하세요..
은수: 결혼 해봤어요. 
상우: …(아아 입을 꼬매버렸어야ㄴ이ㅏ렁ㄴ리 ㅜㅜ)
은수: 소화기 사용법 알아요?

머쓱한 둘 사이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농담처럼 던지는 말. 상대방이 몇 개 상비하고 있으면 참 편할 것 같은데. 상우는 그 빈 말을 받아줄 재간이 없어 은수는 하염없이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고 불길이 있는 곳을 등지고…”를 외고 앉았다. 아이고 두야.

반면에 좋은 예, 상우와 앉았던 자판기 앞 소파에서 새로운 남자에게

 
은수: 소화기 사용법 알아요?
남자: 분위기 전환법은 아는데. 치킨에 맥주 한 잔 할래요?

은수는 그 자리에서 자꾸만 미안하고 안쓰러운 상우가 생각났을텐데. 이 남자의 한 마디에 상우는 이미 저 멀리에.


# 치트키 4. 들이기.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은수 "라면 먹을래요?"

고색창연한 ‘커피 한 잔’ 보다 솔직하게,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대범하게. 적당한 취기와 아쉬움에 대한 허기가 라면에 참이슬 한 잔으로 들불처럼 일어온다. 그렇지만 라면말고 다른 것은 먹이지 말 것. 특히 다시 들이고 싶은 사람이라면 절대적으루다가. 더불어 방은 좀 치워놓고 삽시다.



# 치트키 5. 밀어내기.

라면먹고 땡땡 뿔어터진 얼굴로 아침, 상우의 더듬더듬을 물리치며 은수 좀 더 친해지면 해요.”

좋은 사람은 느긋하게 뜸 들여도 괜찮아. 멸치과 언니들은 특히 더 새겨두었으면 좋겠어. 못참겠으면 어제 술마시고 안씻고 잤을테니 그 온갖 체취의 기억을 끄집어내보도록.


# 치트키 6. 마음단속.

힘들어하는 상우를 바라보며 할머니,뻐스랑 여자는 떠나면 잡는게 아니야”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사신다. 사랑하다 다친 마음도 그래. 도무지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 사람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싶지만 다시는 안잡히는 걸 아니까, 모범답안 앞에 두고 버스 옆에서 전력질주 하고 그러는거 없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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